서귀포 매일올레시장, 바람과 식욕 사이를 걷는 오후
계절이 바뀌는 4월의 끝자락, 봄비가 내리다 말고 이내 투명한 햇살이 골목 끝을 비추는 날이었다. 서귀포시 중앙로 골목 안쪽, 은은한 귤향과 바다 바람이 얽히는 자리에서 나지막한 아케이드 너머 ‘매일올레시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허망한 속세의 시간들과는 조금 다른 질감의 곳. 소리와 냄새와 사람 얼굴이 동시에 밀려오는 이 낯선 감각은, 일상을 딛고 온 나의 감정까지 살아 움직이게 만들었다.
무언가를 사러 온다기보다는, 시간을 '걸러' 가듯 걷고 싶어지는 시장. 삶의 부족한 여백들을 채우러 온 듯한 이들에게 매일올레시장은 평범하지만 진한 접촉을 건넨다.
귤즙처럼 탁 터지는 감정, 시장의 입구에서
시장 입구에 들어서기 전부터 향기가 마음을 끌어당긴다. 5월의 더운 기운을 품은 제주산 딸기와 갓 짜낸 청귤청의 새콤함이 섞인 공기. 노점마다 쌓인 고등어구이의 은은한 불향이 아직 점심을 거른 배를 은근히 자극한다.
자그마한 칼국수집, 유난히 재료가 선명해 보이는 전 골목, 그리고 도너츠와 오메기떡을 손에 쥐고 걷는 이들—나도 모르게 조심스럽게 줄을 선다. 지역 주민과 여행자, 공간과 감정이 서로의 흐름을 어색하지 않게 공유한다.
여기서 만난 할머니는 30년째 제주당근김밥을 말고 계셨다. “자꾸 해도 안 질려. 내 손맛이 아니라, 당근이 맛나서 그런가봐.” 제주 방언이 스며든 말끝에는 자연에 대한 존중과 소박한 자긍심이 있었다. 관광객을 '타깃'이 아닌 ‘같은 흐름을 타는 사람’으로 대하는 태도, 그게 이 공간을 단단히 붙잡고 있는 근본이다.
소리 없는 컬러 – 쇼핑이 아닌 경험이 되는 제주 로컬의 물건들
시장 중심부 깊숙이 들어가면 기성 제품과는 결이 다른 손길의 흔적들이 숨는다. 수공예 목공 소품, 핸드메이드 조리도구, 감귤나무 껍질로 염색한 스카프. 실용성과 감상을 절묘하게 오가는 것들이다. 소장보단 사용을 위한, 기념품 아닌 삶의 물건들.
오후 빛이 기울며 진열대 위로 귤빛이 스며든다. 사람들은 무언가를 사기보단 물건을 만지고, 겹겹이 포개진 루트 사이를 자연스레 헤맨다. 눈이 아닌 손과 걸음으로 기억하는 시장, 그런 시장이 지금의 도시에서 다른 감각을 일깨운다.
계절의 배경, 바람과 맛이 기억되는 체험
시장에서 놓쳐선 안 될 몇 가지가 있다. 바삭한 튀김소보로에 흑돼지 육즙이 스며든 크로켓, 여름엔 단호박빙수와 보름달처럼 동그란 해초전. 어느 계절에 오더라도 가장 '그 계절 같은' 재료가 가장 '제주다움'을 증명해낸다.
하지만 가장 인상 깊은 건, 퇴근하며 귤껍질을 모아 말리는 어느 상인의 뒷모습. 그건 이 시장, 아니 서귀포라는 도시의 속도감이 줬던 다정한 풍경이었다. 아직도 손끝에 귤기름의 향이 남을 것만 같다.
돌아가는 골목에서, 여행이 삶을 스며들게 한다면
매일올레시장은 단순히 지역의 재료나 먹을거리의 유산을 연결하는 곳이 아니다. 그것은 감정이 잠시 머무는 정류장이자, 지방 도시의 ‘느림’과 만남이 주는 회복의 시간이기도 하다. 서울에서 온 젊은 부부에게선 “일상에선 볼 수 없는 인내로운 시선과 따뜻한 말투가 좋았다”는 말이 들렸다.
걷다가 그냥 멈추고, 지나가다 다시 돌아보게 되는 이 골목은 어쩐지 하루에 한 조각씩만 보는 퍼즐 같다. 전부 경험하지 않아도 된다. 경험한 만큼만 마음 안에 두고 돌아와도, 그곳은 당신 안에서 자라기 시작할 것이다.
지금 우리가 진짜 원하는 여행은 어떤 모습일까. 어떤 카페를 찾느냐보다 더 중요한 건, 어떤 공간이 오늘의 나에게 말을 걸었느냐가 아닐까.
서귀포의 시장은 대단한 테마나 요란한 리뷰가 없어도 된다. 단지 느긋함 하나면 충분하다. 당장 떠날 수 없다면, 오늘 저녁엔 귤차 한 잔을 그 시간처럼 마셔보자. 그리고 다음 달 캘린더의 하루를 ‘서귀포 산책의 날’로 미리 표시해두자. 살아 있는 여행은 그렇게 천천히 일상에 침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