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귀포의 바람을 담다 – 감귤 향기에서 오메기떡까지, 여행이 남긴 감각들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유채꽃밭과 해안선을 따라 흐르는 회색빛 바다는 서귀포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여행자의 마음을 낮춘다. 봄이 한창일 무렵, 감귤밭에는 아직 수확을 끝낸 뒤 남은 향이 공기 속에 스며 있고, 돌담 골목은 습기를 머금은 이끼 냄새로 가득하다. 이번 서귀포 여행은 특별한 목적 없이, 감정을 맡기듯 걸어보고 와닿는 것을 수집하듯 다녀온 여정이었다. 그리고 돌아와 짐을 풀며 마지막으로 남긴 것은, 오메기떡 몇 조각과 유리병에 담긴 감귤잼 두 병. 사소해 보이는 이 기념품들이 여행을 다시 시작하게 만들고 있었다.
느린 바람과 함께 걷는 올레, 감성은 어디서 피어나는가
서귀포의 풍경은 급하지 않다. 올레길의 봄은 발끝에서 피어나며, 현무암 담벼락을 따라 이어진 길은 사람을 낮추고, 땅과 가까운 시선으로 이끈다. 특히 올레 6코스를 따라 걷다 보면 소중하게 남기고 싶은 순간이 자주 생긴다. 집집마다 작은 귤나무들이 정원을 이루고, 마치 귤 한 알도 함부로 다룰 수 없을 것 같은 섬세함으로 다듬어진 풍경이 여행자에게 말을 건넨다.
골목 어귀의 작은 카페 ‘푸름다’에서 감귤차를 주문했을 때, 로컬 농가에서 직접 짜낸 즙이라는 설명 뒤에는 얼굴 모를 농부의 시간이 담겨 있었다. 우리는 결국 사소한 디테일 속에서 지역의 넉넉함과 정서를 마주하고, 그것을 품고 돌아갈 수밖에 없다.
오메기떡 한 점에 담긴 섬의 시간
노란 방앗간 간판 아래 줄지어 선 사람들. 서귀포 전통시장에서 아침을 맞이하는 이들의 손에는 꼭 작고 동그란 떡 봉지가 하나씩 들려 있었다. 오메기떡은 찹쌀과 차조, 그리고 팥앙금을 품고 굳지 않게 만드는 법이 핵심이다. 그 부드러움은 서귀포의 공기처럼 양손에 싣고 오래 들고 다니고 싶어지는 감촉이다.
기념품으로서 오메기떡은 흔한 선택일지 몰라도, ‘어디에서 만들었는가’와 ‘무엇을 담았는가’에 따라 이야기가 달라진다. '정실마을 방앗간'의 오메기떡은 설탕 대신 조청으로 단맛을 내며, 산림초에서 직접 재배한 쑥을 말려 쓰는 정성을 들인다. 한입 베어물면, 단순한 간식의 경계를 넘고, 이 지역의 봄빛과 노동, 부드러운 오후 햇살까지 함께 씹는 기분이 든다.
유리병에 갇힌 햇살, 감귤잼의 무엇
감귤잼은 마트에서도 살 수 있지만, 서귀포의 소규모 작업장에서 손수 만든 잼은 전혀 다른 결의 정서를 담고 있다. ‘귤나무사이’라는 이름의 작은 농장에서는 무농약 감귤을 천천히 졸여 만든 잼을 한 병씩 병입하는데, 그 안에는 지난겨울 내내 귤밭을 돌보던 농부의 체온이 아직 남아 있다.
톡 터지는 산미와 잔잔한 단맛은 새벽 비가 내린 후의 숲과 닮았고, 흰 식빵 위에 발라 아침을 시작하면 여전히 여행이 계속되는 기분이 든다. 내 아파트 베란다 위 햇살에서도, 서귀포의 오후가 언뜻 스며드는 순간. 기념품이란 결국 그러한 ‘감각의 복제물’이다.
돌아오는 길, 마음에도 짐이 하나 더 생긴다
바람에 흩날리던 해녀복, 남원읍 카페 테이블 위 놓여 있던 감귤꽃, 제주어로 써진 메뉴판의 낯선 단어. 여행이 지나간 자리에 남는 것은 사진이나 지도보다 이질적 공간에서 감각이 깨지는 경험이다. 그리고 그 감각은 오롯한 일상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에 조용한 질문을 건넨다.
지금 우리가 진짜 원하는 여행은 어떤 모습일까요? 잠깐의 일탈이 아닌, 누군가의 삶 속으로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기회. 서귀포는 그저 풍경의 도시가 아니라, 시간과 감정이 조용히 스며드는 곳이었다.
감귤잼 한 병과 오메기떡 몇 조각은 남에게 자랑하기엔 소박하지만, 그 속에 담긴 계절과 공간, 사람의 이야기는 결코 가볍지 않다. 이번 주말, 가까운 지인에게 제주 감귤차를 한 잔 권해보며 이 여행을 조금 더 이어갈 수 있다면. 아마도 다음 여행은 이유 없이 다시 서귀포가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