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과 중심 사회 속 자기혐오와 예술의 전환 가능성

You are currently viewing 성과 중심 사회 속 자기혐오와 예술의 전환 가능성
나는 충분하지 않다 문화의 해부 성과 강박과 예술의 치유적 가능성

‘충분하지 않음’의 문화, 예술은 어떻게 응답하는가 – 성과 사회 속 자기혐오와 미학적 저항의 풍경

‘나는 왜 충분하지 않은가’라는 질문은 이제 개인의 자아 성찰 수준을 넘어, 하나의 문화적 신드롬이 되었다. 소셜 미디어의 정제된 이미지와 무한 자기계발 콘텐츠가 만들어내는 이 자기혐오의 정서는, 단순한 내면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성과 중심 사회의 산물이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오늘날 예술은 사회적 규율에 맞서 ‘불완전성’과 ‘비생산성’을 미학적 언어로 번역하며, 새로운 문화적 담론을 구성해낸다.

오늘날의 예술과 문화는 ‘성과’라는 절대적 명령어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 저항하고, 또 어떻게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는가? 이 물음을 중심으로 자기검열과 자기혐오를 문화적 구조로 파헤치고, 그 탈출구를 예술의 실천에서 모색해보고자 한다.

성과 강박의 시대, 결핍은 미학일 수 있는가

하르트무트 로사가 말한 '가속 사회'는 우리에게 쉼조차 하나의 과제로 환원시킨다. "이미 잘하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그 말조차 불안을 자극하는 위로로 전락하는 현실. 이 역설적 위로의 구조는 현대예술에도 깊이 침투해 있다.

미국의 에이미 셰럴드, 일본의 다카시 무라카미 같은 작가들이 불완전한 구도, 의도적으로 거칠게 처리된 구성을 선택하는 이유는 단순히 형식적 실험이 아니다. 이들은 소비사회의 ‘성공적 이미지’를 해체하며, ‘잘되지 않은 것’, ‘하면 안 되는 방식’이 오히려 우리의 진짜 얼굴일 수 있음을 주장한다. 예술은 더 이상 완성도를 자랑하는 시각적 제품이 아니라, 성과 서사의 반체제로 기능한다.

비교에 지친 자아,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장 보드리야르가 설파한 이미지 과잉 사회에서, 우리는 타인의 행복과 생산성을 실시간으로 소비하고 있다. 자기 자신조차 타인의 시선 속 가공된 콘텐츠로 납작하게 변형되는 이 현실은, 곧 정체성 혼란을 부른다.

1인 중심의 자서전적 예술 작업은 이러한 정체성의 흔들림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예를 들어 페트라 콜린스의 사진은 필터 없는 감정과 허약한 몸, 문득의 우울을 ‘인스타그램적 심미성’으로 포장하지 않고 날 것 그대로 노출한다. 예술가의 작업은 사회가 요구하는 퍼스널 브랜딩을 전복하며, 타인과 비교되는 자아가 아닌, 고유한 내면의 실재를 기입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게으름과 쉼, 비생산은 저항이 될 수 있는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죄책감 없이 받아들이는 일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K-팝 아이돌의 자기관리 이미지나 ‘몸 관리’에 대한 집착은 쉼마저 철저히 기획된 활동으로 만드는 대표 사례다. 그런 맥락에서 최근 동시대 예술의 흐름 중 하나인 슬로우 아트, 명상 퍼포먼스, 게으름 워크숍 등은 주목할 만한 반문화적 전략이다.

이러한 작품들은 관객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기’를 경험하게 함으로써, 성과를 숭배하는 일상의 리듬을 멈추게 한다. 이는 단순한 휴식이 아니라 재현되지 않는 감정, 흘러가는 시간 자체의 회복을 통한 심리적 역전이다.

‘이루지 못한 서사’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성공신화의 외피 밖에는 언제나 ‘이루지 못한 서사’가 있다. 예술은 이 실패와 멈춤의 이야기들을 존엄하게 다룬다. 임흥순 감독이 가족사를 통해 보여주는 분열과 상처의 기록은, 개인의 불완전한 서사가 집단 기억으로 확장될 수 있음을 증명한다.

이런 예술은 치유의 차원을 넘어, ‘누구의 이야기만 존중받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문화적 실천이 된다. 결국 탈성장 시대, 예술은 완성되지 않은 존재를 그 자체로 가치 있게 조망하는 민주적 언어로 작동한다.

공감 자본주의와 감정의 상품화에 맞서는 예술의 역할

오늘날 SNS와 콘텐츠 산업은 자기연민마저 ‘공감하는 이야기’로 소비하게 만든다. “지금의 나를 받아들여라”는 말조차 또 다른 자기계발의 명령처럼 들릴 정도다. 이에 대해 에바 일루즈는 감정의 상업화를 ‘감정 자본주의’라 분석하며, 개인의 정서마저 시장에 흡수되는 현실을 경고한다.

예술은 이러한 감정의 환류 선상에서, ‘소비되지 않는 감정’을 창작하는 드문 매체다. 울음과 침묵, 반복과 쉼이라는 형식적 전략을 통해, 감정의 속도와 방향을 조절하고, 공감이라는 이름의 또 다른 강요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통로를 제시한다.

오늘의 성과 문화를 예술이 거부한다고 해서, 현실이 즉각 바뀌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예술이라는 토대 위에서 우리는 다시 질문할 수 있다. “정말로 내가 더 나아져야 하는가? 아니면 지금 나의 위치가 이미 하나의 의미일 수는 없는가?”

지금 이 글을 읽은 당신에게 권하고 싶은 경험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일상의 속도를 늦추고 ‘불완전함’을 감각할 수 있는 예술작품을 마주하는 것이다. 슬로우 아트를 다룬 전시, 또는 과정을 그 자체로 존중하는 독립 다큐멘터리(예: 《먼지의 시간》, 《비행》 등)를 감상하길 권한다. 또한 자기혐오가 시스템의 산물임을 이론적으로 파악하고 싶다면,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우울한 태도》처럼 슬픔과 무기력을 탐구한 문헌을 참고해보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혼자만의 실패라고 느껴졌던 감정이 사실은 수많은 이들이 공유하는 문화적 정동(cultural affect)이라는 점을 자각하는 일이다. 말하고, 나누고, 기록하며, 재현하는 모든 행위가 이미 하나의 예술적 참여다. 지금 이 순간 '충분하지 않음'을 느끼는 당신의 삶도, 결국 하나의 서사가 되어 타인과 연결될 수 있다.

#aimediacon #콘텐츠자동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