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레길을 걷는다는 건 – 서귀포에서 삶의 속도를 다시 조율하는 일
오래된 길을 새롭게 만나는 6코스의 제주 바다
서귀포 매일올레시장을 지나 큰엉 해안절벽으로 이어지는 올레 6코스는 바다와 삶이 맞닿는 가장 서귀포다운 풍경을 선물한다. 귤 박스를 나르던 골목 끝에서, 귤나무 사이로 흘러들던 바닷바람에 발길이 멈춘다. 걷는다는 건 결국 멈춤의 연속이고, 이 길 위에선 그 멈춤들이 하나의 감각이 된다. 무심히 지나쳤던 파도소리가 귓가를 어루만지고, 햇살이 뺨을 스치며 마음속 먼지를 털어낸다. 비오는 날의 6코스는 가장 에세이적인 시간이 된다. 축축한 귤 향, 우산 끝에 맺힌 물방울, 흐릿하게 번지는 바다의 수평선이 온몸을 감각화시킨다.
작은 마을과 능선 사이, 가장 서정적인 7코스
월평마을에서 외돌개까지 이어지는 올레 7코스는 적당히 고요하고, 충분히 정겹다. 누군가의 삶이 아주 천천히 흐르는 마을길을 걷다 보면, 여행자가 아닌 ‘손님’이 되는 묘한 기분이 든다. 마을 안 허름한 평상 위에서 귤껍질을 벗기던 할머니와 눈이 마주치고, 그 껍질이 간직한 삶의 농도를 따라 걷는다. 대평포구 너머 펼쳐지는 곶자왈 숲길에서는 습한 공기에 숨어 있던 향기가 서서히 피어오른다. 숨겨진 찻집 ‘고요茶일기’에선 도심에서 내리던 복잡한 생각들이 수증기처럼 날아간다.
수직의 바람과 평평한 바다를 잇는 8코스의 드라마
대평포구에서 월평마을로 돌아가는 8코스는 가장 지형적으로 역동적인 여정이다. 올레길 중 유일하게 해발 500미터 이상을 걷는 코스. 산과 바다 사이, 수직으로 솟은 바람이 몸을 밀어내고, 멀리 한라산 자락이 걸음을 붙든다. 도순다원 근처에선 녹차밭을 따라 구르는 바람 소리가 길동무가 되어준다. 이 길의 매력은 ‘바라봄’이 아닌 ‘사이’를 걷는 것이란 데 있다. 바다와 산, 바람과 안개 사이. 그 중간색의 감정들 – 막막함과 설렘, 두려움과 평화 – 자신도 미처 몰랐던 속도를 찾아간다.
사람 없는 시간, 빛이 말을 걸어오는 9코스
해안선을 따라 수월봉까지 향하는 9코스는 특히 겨울 오후의 햇살 아래 걷기를 추천하고 싶다. 인적이 드물고, 따뜻한 빛이 낮게 드리우며 바다의 표정을 바꾼다. 1월의 한낮, 바람을 피해 성산일출봉 너머로 기울어진 빛이 곶자왈 숲 아래 반짝이던 순간은, 언어를 잃는 경험이었다. 숲과 바다, 햇살과 이끼 낀 돌무덤. 마치 오랜 기억 속 장면을 걷고 있는 듯한 착각. 이 곳에선 '여행자'라 불리는 감각조차 흐릿해진다. 다만, 살아있다는 감정만이 또렷하다.
시간이 늘어나는 마을, 감정의 포구 10코스
화순해수욕장에서 송악산까지 이어지는 10코스는 육중한 감정이 깃든 길이다. 일제 강점기 일본군의 포진지 흔적이 남아 있는 송악산 둘레길을 따라 걸으면, 자연은 눈부시지만 마음은 복잡해진다. 아름다움이 늘 경쾌하지는 않다는 걸 깨닫게 된다. 하지만 그 무거움도 여행의 일부일 수 있다. 송악산 아래 조용히 문을 연 작은 카페 ‘기억의 창’에서는 현지 작가의 사진전이 열린다. 지워지지 않는 풍경과 감정들,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여행자가 흔히 마주치기 힘든 진짜 지역의 얼굴이 있다.
우리는 왜 걷는가, 그리고 어디로 돌아오는가
지금 우리가 진짜 원하는 여행은 어떤 모습일까? 어쩌면 그것은 목적지가 아닌 리듬의 회복일지도 모른다. 서귀포의 올레길은 에너지를 쏟는 여행이 아닌, 에너지를 머금는 여행이다. 낯선 공기 속에서 내 호흡을 찾고, 천천히 걷는 길 위에서 마음의 쉼표를 찍는 일. 누군가는 말없이 나무 아래 앉고, 누군가는 갑자기 중얼거리는 시 한 구절에 멈춰 선다.
그 여백의 시간 너머, 우리는 조금 더 자신에게 다가선다. 서귀포의 길들이 그저 방향을 알려주는 화살표만은 아닌 이유다.
지금이 그 길을 걸어볼 시간이다. 걷고 싶은 한 코스를 골라 메모장에 써보자. 날씨를 검색하고, 그날의 신발을 정하고, 마음의 속도를 조금 느슨히 해보자. 서귀포의 올레길은 단지 제주의 트레킹 코스가 아니다. 당신 삶의 어딘가를 다녀오는 여행이기도 하다.